[매일일보 칼럼] 당신의 집은 몇 급지(級地)에 있습니까?

 

 근래 온라인 커뮤니티를 뜨겁게 달군 '서울 아파트 급지 지도'를 보며 씁쓸한 뒷맛을 지울 수 없었다. 서울 전역을 펼쳐 놓고 강남 압구정과 반포를 1급지인 붉은색으로, 그 외 지역을 노란색과 초록색으로 칠해 등급을 매긴 그 지도는 섬뜩하리만큼 적나라했다. 마치 정육점에 걸린 한우 등급 판별표처럼, 사람이 사는 터전을 색깔로 구분해 전시한 모습에서, 사는 곳이 곧 그 사람의 계급이 되어버린 대한민국 사회의 민낯이 이토록 노골적으로 시각화된 적이 있었던가.

 

 우리에게 '집(家)'은 식구(食口)가 모여 밥을 먹고, 고단한 몸을 누이는 안식처였다. "어디 사세요?"라는 질문은 상대의 생활 반경을 묻는 정겨운 인사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질문은 상대방의 자산 규모를 가늠하고, 나와 '급'이 맞는 사람인지를 탐색하는 차가운 심문에 가까워졌다. '급지 지도'는 이러한 심리를 시각화한 결정체다. 주거지가 곧 그 사람의 신분증이 되고, 아파트 브랜드가 인격의 척도처럼 취급되는 풍경은 우리 사회가 주거를 지나치게 '서열'과 '성과'의 언어로 번역해 온 결과이다.

 

 이러한 서열화가 드리운 그늘은 깊고 어둡다. 아파트 브랜드로 입주민과 임대주택 거주민을 차별하고, 아이들이 사는 단지에 따라 친구 그룹이 나뉜다는 이야기는 이제 낯설지도 않다. 물리적인 담벼락보다 더 높은 심리적 담벼락이 이웃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셈이다. 상급지로 갈아타기 위해 영혼까지 끌어 모으는 '영끌' 현상 역시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함이 아니라, 이 견고한 서열 구조에서 도태되지 않으려는 처절한 몸부림으로 읽힌다.

 

 문제는 이러한 급지 논리가 지방 도시까지 전염되고 있다는 점이다. 서울의 잣대를 들이대며 지방의 가치를 폄하하거나, 지방 도시 내부에서도 자체적인 서열을 매기며 위화감을 조성한다. 내가 사는 동네의 고유한 역사와 문화, 이웃 간의 정(情)과 같은 무형의 가치는 '평당 가격'이라는 숫자 앞에서 무력하게 지워진다. 1급지에 살지 못하면 인생의 패배자가 된 듯한 상대적 박탈감은 우리 사회의 행복 지수를 갉아먹는 주범이 된다.

 

 건설 분쟁을 다루다 보면, 평당 1억 원을 호가하는 1급지 아파트나 서민들이 거주하는 오래된 빌라나 그 뼈대를 이루는 물성이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된다. 화려한 대리석 마감재와 그럴듯한 조경 뒤에 숨겨진 골조를 들여다보면, 모든 집은 결국 시멘트와 자갈, 모래와 물이 섞인 콘크리트, 그리고 차가운 철근 덩어리일 뿐이다. 하이엔드 브랜드라는 명패를 달고 있어도 시공 관리가 부실하면 천장에서 물이 새고 벽에 곰팡이가 피는 것은 매한가지다. 그들이 자랑하는 '급지'의 위상이 무색하게도, 콘크리트의 양생(굳힘) 과정은 집값을 따지지 않고 물리 법칙에만 정직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급지 지도'가 위험한 진짜 이유는 그것이 물리적인 담벼락보다 더 높은 '심리적 담벼락'을 세우기 때문이다. 임대 주택 거주민과 분양 주택 거주민의 동선을 철저히 분리하고, 다른 단지 아이들이 놀이터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어른들의 이기심은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대물림된다. "너네 집은 몇 급지야?"라는 질문이 아이들의 입에서 나올 때, 우리 사회의 미래도 암울해진다.

 

 집은 투자의 대상이기 이전에 삶을 영위하는 공간이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명품 주거지는 집값 순위로 결정되는 붉은색 지역이 아니다. 비록 건물이 조금 낡았더라도 이웃 간에 온기가 흐르고, 아이들이 안전하게 뛰어놀 수 있으며, 저녁이면 밥 짓는 냄새가 편안하게 퍼지는 곳이 진짜 '1급지'이다. "당신의 집은 몇 급지에 있습니까?"라는 천박한 질문 대신, "당신의 집에서는 웃음소리가 들립니까?"라고 묻는 사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지도가 아닌 삶을 들여다볼 때, 비로소 집은 투기판의 말이 아닌 진정한 '나의 집'으로 돌아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