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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연한 봄기운에도 불구하고 이사 트럭과 사다리차가 분주히 오가야 할 아파트 단지들이 묘하게 정적에 휩싸여 있다. 해마다 이맘때면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이삿짐 박스들이 단지 입구를 가득 메우곤 했지만, 올해의 풍경은 사뭇 다르다. 주거지를 옮기는 역동성 대신, 지금 발을 딛고 있는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고자 하는 침묵이 시장 전체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의 중심에는 이른바 '눌러앉기'가 있다. 통상적인 이사철임에도 불구하고 임차인들이 새로운 집을 찾아 떠나기보다는, 기존의 전·월세 계약을 연장하거나 계약갱신요구권을 행사하며 현재 거주지에 그대로 머무는 것이다.
언뜻 보면, 계약을 연장해 계속 거주한다는 것이 주거의 안정성으로 이어지는 긍정적인 현상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서울의 갱신 증가는 만족스러운 정착의 결과라기보다, 이사할수록 더 불리해지는 구조가 만들어낸 소극적인 체류에 가깝다.
시장이 조용해 보인다고 해서 편안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많은 세입자가 움직일 엄두를 내지 못해 숨을 죽이고 있는 쪽에 가깝다.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시스템에 의하면, 2026년 1월부터 3월까지 서울 아파트 전·월세 계약 가운데 갱신계약 비중은 48.2%로 집계됐다. 지난해 평균 41.2%보다 7%포인트 높아진 수치다. 특히, 3월에는 갱신계약 비율이 51.8%로 신규 계약을 넘어섰다.
지난해 10월 서울 전역이 토지거래허가구역으로 묶인 뒤 갱신 비중은 10월 41.93%, 12월 43.22%, 올해 1월 45.9%, 2월 49%를 거쳐 3월에는 50%를 넘겼다. 이제 서울 임대차시장은 새로 옮겨가는 시장이라기보다, 기존 계약을 붙들고 버티는 시장으로 성격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비용이다. 2년 전보다 전·월세 시세가 오른 상황에서 새집으로 옮기려면 보증금을 더 마련해야 하고, 중개보수와 이사비용도 감당해야 한다. 반면, 임차인이 주택임대차보호법상 계약갱신요구권을 행사하면 이때 임대인이 보증금을 인상할 수 있는 폭이 5%로 제한되기 때문에, 세입자 입장에서는 상대적으로 부담이 덜하다.
여기에 지난해 10·15 부동산 대책으로 서울 전역이 토지거래허가구역으로 지정돼 매수자의 실거주 의무가 강화됨으로써 그 여파로 신규 전·월세 물건 자체가 줄었고, 정부의 강력한 대출 규제까지 겹치면서 선택 가능한 집을 찾는 일도 훨씬 어려워졌다. 결국 세입자는 더 좋은 선택을 해서 남는 것이 아니라, 덜 불리한 선택으로 남게 된다. '눌러앉기'가 선호의 결과가 아니라 제약의 결과가 된 셈이다.
주거의 안정은 단지 한곳에 오래 머무는 데서만 오지 않는다. 필요할 때 감당 가능한 비용으로 옮길 수 있는 자유, 소득과 자금 사정에 맞는 집을 선택할 수 있는 유연성, 그리고 계약 만료가 곧바로 불안과 공포로 이어지지 않는 예측 가능성이 함께 보장될 때 비로소 안정이라 부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눌러앉기'는 안정의 다른 이름으로 볼 수 없다.
물론, 모든 갱신이 비자발적인 체류를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최근 서울의 갱신 비율은 만족의 결과라기보다 비용 상승과 공급 축소 속에서 이동이 어려워진 현실을 더 강하게 반영하고 있다. 때문에 우리는 높은 갱신 비율이라는 표면적 숫자에 안도해서는 안 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재계약 비중이 높아졌다는 사실 자체를 안정의 근거로 소비하는 일이 아니라, 왜 이렇게 많은 세입자가 새로운 선택을 하지 못하고 제자리에 머물 수밖에 없는지 그 구조적인 원인을 직시하는 일이다.
조용한 시장이 반드시 건강한 시장은 아니다. 지금 서울의 전·월세시장이 보여주는 평온은 안정보다 체념에 가까울 수 있다. 그리고 그 체념이 길어질수록, 주거 사다리의 한 축이었던 전·월세 제도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선택 가능한 제도'가 아니라 ‘간신히 버티는 방식’으로 남게 될 것이다.